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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그는 갔지만, 나는 그를 보내지 않았습니다
돈키호테가 마지막 가쁜 숨을 무대에서 내쉰다. 그 곁에서 조카 딸과 그녀의 약혼자, 신부, 하녀가 병상을 지키고 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돈키호테 팬클럽 회장(!) 산초가 들어와서 수다를 떤다. 알돈자가 내달려 들어와서는 흐느끼기 시작한다. 그녀의 얼굴도 못 알아 보던 그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아는 체를 한다. 그리고는 영영 다시 오지 못할 그곳으로 떠나버린다.
아니, 저렇게 떠나는 것입니까. 돈키호테 할아버지. 객석은 이미 눈물 바다. 나도 엉엉.
누군가 나에게 가장 사랑하는 작품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언제나 난 이 작품을 가장 1번으로 꼽는다. 바로 이번에 소개할 작품, <맨 오브 라만차> 라만차의 기사, 돈키호테의 이야기다.
이룰 수 없는 꿈을 즐길 수 있었던 사나이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의 형식은 무척이나 독특하다. 돈키호테란 인물의 삶을 시간 순서대로 다루는 것이 아니라, "감옥에서 자신이 쓴 희곡을 공연하는, 작가 세르반테스의 이야기"란 액자 형식으로 스토리가 이어진다.
이 작품 첫 액자의 시대 배경은 종교 재판이 성행하던 시기다.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잡혀 고문을 당하고 목이 잘리고 화형을 당했던 ... 암흑 시대다. 작가 세르반테스는 그런 시대에 지하 감옥에 갇혀, 언제 죽을지 모르는 죄수들을 상대로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감옥의 벽은 무대 장치, 죄수들은 배우가 된다. 공연의 중간 중간 사람이 끌려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음 사형대에 오를 사람의 이름이 호명되지만, 그들은 그 나름대로 지하의 시간을 묵묵하게 만들어 간다. 말도 안되는 곳에서 꾸는 작은 희망의 꿈. 돈키호테는 어쩌면 그들 자신 하나하나의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세르반테스의 손에서 두 번째 액자 이야기가 펼쳐진다. 바로 '돈키호테' 어르신의 이야기다. 미친 세상에서 미친 놈으로 살아가든, 제대로 정신 박힌 인간으로 살아가든 그 누구도 행복할 수 없다는 건 우리 모두의 비극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세르반테스는 돈키호테를 통해 비록 이룰 수 없는 꿈이라도 그것을 위해 살아갈 수 있다면, 그것이 행복한 사람의 삶이 될 수 있다는 소박하지만 위대한 진리를 우리에게 이야기한다. 제 몸 간수하기 힘든 노인네가 기사가 되겠다고 풍차를 들이받고, 여관에서 몽상을 풀어놓는다. 창녀에게 고귀한 '둘시네아' 아가씨라 칭송을 늘어놓고, 천박한 집시 무리는 어느새 왕을 구하기 위해 찬조금을 모으는 신하들의 무리가 된다.

슬픈 수염의 기사, 라만차의 돈키호테
희한하게 공연 보는 걸 그렇게 좋아하면서도, 공연을 보면서 잘 울지 않는다. 평소 눈물이 없는 건 아닌데, 이상하게 만들어낸 이야기를 볼 때 잘 눈물이 나지 않는달까. 아, 그렇다고 감동을 받지 않는다는 건 아니다. 감동을 받는 것과 우는 건은 다른 성격의 것이라, 뭔가 다른 이성이 작동하는 것만 같달까. 근데 언젠가부터 이 <맨 오브 라만차>를 볼 때면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난다. 뭔가 알돈자에 감정이입하는 건지, 돈키호테 할아버지가 죽을 때면 언제나 펑펑 울고 있다는.
자신에게 난생 처음 친절하게 말 걸고, 상냥하고 귀하게 대접해 주는 돈키호테를 보면서, 둘시네아, 즉 알돈자는 어떤 꿈을 꾸었을까. 돈키호테가 살짝 이상하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주인님이 좋아요."라고 말하는 산초는, 돈키호테를 통해 어떤 꿈을 꾸는 것일까.
현실은 차갑다. '혹시 ...'하고 갔던 난폭한 그들에게 알돈자는 지울 수 없는 모욕을 당하고, 다시 부엌데기를 전전하는 더러운 창녀의 삶을 살아간다. 산초 역시 집안 식구들에게 천대받고 사나운 마누라한테 얻어맞는 종놈의 삶일 따름. 사실 돈키호테 자신도 이제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골골한 노인일 뿐이다. 자신의 죽음을 기다리는 조카딸과 음흉한 망상이나 하는 가정부에게 둘러싸여 생을 마감해야 하는 ...
아마도 내가 이 작품을 보고 눈물을 흘리는 건, 내 앞에 놓여있는 냉혹한 현실과 매일 이룰 수 없는 꿈에 헉헉대는 나약한 나란 인간과 그럼에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삶에 대한 미련이, 이 노인네와 가련한 작가의 삶과 겹쳐졌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이룰 수 없는 꿈과 이룰 수 있는 꿈
그가 황당한가? 엉뚱해 보이는가? 그렇다면 우리가 꾸는 꿈이 그의 것보다 뭐가 낫고, 또 뭐가 대단하다는 것인가. 이룰 수 없는 꿈이 결국 몽상으로 버려지는 건 피차 마찬가지인 것을. 사람들은 이루지 못한 꿈에 대한 아쉬움과 회한으로 남은 생을 허비한다. 계속 더 꿈을 꾸고, 또 그 꿈을 즐길 생각을 하지 못한다. 아니, 더 소박하게는 자신이 꿈을 꾸는 동안 행복하고 아름다웠다는 것을 추억해 내지도 못한다. 꿈을 꿀 수 있다는 그 자체가 어쩌면 우리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멋진 일인지도 모르는데 ... 그런 의미에서 돈키호테는 진정 행복한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감옥의 죄수들은 세르반테스가 들려주는 돈키호테의 삶을 통해 새로운 꿈을 꾸고, 우리는 돈키호테와 세르반테스를 통해 또 다시 나의 꿈을 찾는다.
이 이야기를 지어낸 세르반테스 역시, 종교재판을 기다리는 풍전등화의 상황이다. 이처럼 누구에게나 삶은 잔인하고, 또 냉정한 것. 아무리 아름답고 찬란한 꿈을 꾼다고 한들 ... 현실은 바뀌지 않는다. 그러한 진리를 이 작품은 너무도 담담하고 자연스럽게 보여준다. 마구 내달리는 돈키호테의 이야기와 함께, 그때그때 정신을 차려 상황을 정돈하는 세르반테스 자신의 말이 섞여서 말이다. 죄수들의 기도와 함께 감옥의 문을 나가 재판정을 향하는 세르반테스는, 유난히도 슬픈 뒷모습을 하고 있다. 하지만 둘시네아에게 빛나는 꿈을 주고 세상을 떠난 돈키호테처럼, 죄수들에게 역시 따뜻한 희망을 안겨준 세르반테스는 ... 설령 불타 죽는 형벌에 처한다 할지라도 행복한 사람으로 남지 않았을까.
어떤 상황에도 삶은 계속되고,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꿈꿀 수 있다는 특권'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간다. 그것을 즐거이 누리고, 또 그 축복의 특혜를 누리자. 그리고 우리의 돈키호테처럼, 그것을 같이 나눌 수 있다면 더더욱 좋으리 ...
"그 꿈 이룰 수 없어도, 싸움 이길 수 없어도, 슬픔 견딜 수 없다 해도, 길은 험하고 험해도 ...
정의를 위해 싸우리라, 사랑을 믿고 따르리라, 잡을 수 없는 별일 지라도 힘껏 팔을 뻗으리라."
내 앞에 선, 인간적인 얼굴을 한 다정한 미소의 돈키호테는, 언제나 나에게 그렇게 손을 내민다. 그래서 난 세파에 힘들 때면 문득 이 작품이 생각난다. 그리고 힘을 낸다.
나가며
이 작품을 통해 배우 정성화 씨의 팬이 되었다. 지금은 우리나라 대표 뮤지컬 배우로 자리매김 하고 있지만 그가 처음 돈키호테 역할을 맡았을 때, 많은 사람들이 그가 과연 이 역할을 잘 해낼지 물음표를 띄웠었다. 결과는 우리 모두가 아는 바와 같다. 그는 돈키호테의 성공 이후, 안중근과 장발장을 거쳐 지금도 여전히 승승장구하고 있다.
그의 팬으로서 꾸준히 그의 돈키호테를 지켜봤더랬다. 새로운 작품들에 도전하느라 그의 마지막 돈키호테를 본 지도 벌써 꽤 되었지만, '50살이 넘어서도 할 수 있는 역할'이라는 세간의 평과 같이 언젠가 그의 돈키호테를 다시 볼 날을 손꼽아 기다린다. 예전에 정성화의 <맨 오브 라만차>를 관람하고 개인 블로그에 썼던 문구가 이 작품 공식 홍보 자료에 실린 적이 있었다. 이 글의 마무리는 그때 인용되었던 문구로 하고자 한다.
커튼콜.
사람들이 무대를 떠나갈 것같은 환호성으로 객석을 채웠다.
정성화가 등장하는 순간, 물밀듯이 일어나는 관객들.
그리고 귓바퀴에 가득 넘쳐 흘러내리는 갈채.
이런 멋진 작품과
그리고 이런 멋진 음악과
그리고 이런 멋진 배우를 만날 수 있음에 감사했다.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지, 그리고 무엇이 우리를 살게 만드는지 ...
조금은 깊게 생각해 보는 그런 시간이었다.
첫 발걸음, 이어지는 공연마다 신의 가호가 함께 하시기를.
더 많은 이들이 <맨 오브 라만차>가 전하는 메시지를
더 많이 가슴으로 받아낼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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