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베카] 뮤지컬 vs. 소설

[레베카] 뮤지컬 vs. 소설

누구에게나 항상 최고로 매력적인 그녀, 레베카

풀잎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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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은 노된 스토리

아마도 7-80년 전 사람이었다면 <레베카>의 스토리가 무척이나 파격적이고 신비로웠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2022년이다. 이 정도 느낌의 스릴러는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하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은 '반전 스릴러'로 분류하기엔 좀 아쉽다. 하지만 오랜 생명력을 가진 작품이 가진 장점은 쉬이 무시할 수 없다. 작품을 이끌어가는 미묘한 분위기와 힘은 여전히 살아있으니 말이다. 흔히 이야기하는 반전에 대한 기대는 사그리 잊고, 순수하게 스토리와 인물들에 집중하여 보면, 훨씬 더 흥미롭게 즐길 수 있다. 예전에 쓰여진 소설은 다소 지리하고 노되다면, 뮤지컬은 훨씬 더 현재적이고 팬시하다. 그런 의미에서 소설과 뮤지컬은 세련됨의 감도가 다르다.

인물의 묘사나 전개도 상당히 전형적이다. 그런데 그 나름의 고풍스러움과 멋스러움이 있다. 물론 내가 본 조합의 배우들은 서로 간의 합이 매우 좋아서인지, 보는 내내 몰입도가 상당했다. 매우 신경 쓴 의상이나 세트도 인상적이었다.

뮤지컬의 원작을 찾아 읽다 보면, 원작을 뛰어 넘는 변용작이 참 드물다는 생각이 드는데 - 바로 이 <레베카>가 그 드문 작품 중 하나가 되시겠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엔 뮤지컬 배역에 대한 이야기를 좀더 해볼까 한다.  

다양한 캐스팅의 막심: 문득 류정한 이야기

초연도 그렇고 이후 재연에서도 선택지 가운데 가장 안전하고 신뢰로운 캐스팅을 꼽으라고 한다면, 난 류정한을 꼽을 것이다. 물론 그가 더 나이가 들어 더 이상 무대에 서기 힘들다면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로는 가장 싱크로율이 높은 배우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 작품은 주기적으로 올라오는 인기작이고, 그러다 보니 캐스팅된 배우들이 각기 다른 개성을 가진 좋은 배우들이 캐스팅 되고 있다. 그러니, 그때그때 감상의 폭은 매우 다를 듯 싶다. (어쩌다 보니 이 작품을 여러 번 보게 되어서 꽤 많은 막심을 보았는데 일단, 류정한이 가진 고유의 분위기는 이 배역에 상당히 잘 어울린다.) 노래도, 이 인물의 이미지도 그랬다. 확실히 그는 이런 느낌의 배역이 정말 잘 맞는 것 같구나. 날카로운 미소, 는 정말 그를 묘사하는 최고 적절한 미사어구인 듯.

사실 '가장 좋아하는 배우'로 류정한을 꼽는 건 아니지만 '무대에서 가장 섹시한 배우'로는 류정한이 먼저 떠오른다. 그의 무대를 볼 때마다 변치않는 감상은, 그가 참 섹시한 남자라는 것이다. 육체적으로 드러나는 물리적 섹시함은 아니지만, 그에게는 뭔가 고풍스럽지만 원숙미 있는 칼날같은 섹시함이 있다. 그게 외모에, 분위기에, 그의 음성까지 상당히 훌륭한 조화를 이룬다. 그런 의미에서 그가 우리나라 뮤지컬 계에 가지고 있는 지분은 여전히 유효하다. 아무리 새파랗게 젊고 싱싱한 배우들이 치고 올라온다고 해도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고음이 세월에 치어 조금씩 무디어 지는 건 속상한 일이다. 하지만 그만큼 노련미와 원숙미가 더해간다는 건 상대적으로 바람직한 일일 것이다. ... 어쨌거나 그런 그의 강점이 꽤나 잘 드러나는 작품이 바로 이 <레베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구나.

(개인적으로는 이 배역에 가장 이례적인 캐스팅은 정성화였다. 다시 그가 이 배역으로 무대에 설 날이 언제 올지는 모르겠지만, 원작에서도 심지어 찾아보기 힘든, 따뜻하고 순둥순둥한 막심을 볼 수 있었다. 그게 참 좋았었다는)

다양한 캐스팅, 댄버스

이 작품의 중심은 댄버스 부인이다. "레베카" 넘버가 이 작품을 상징하는 넘버라는 것에서부터 일단 그렇다. 신영숙, 옥주현, 김선영, 차지연, 옥주현, 장은아를 봤는데 - 개인적으로는 김선영의 댄버스를 가장 좋아한다. 하지만 모든 댄버스가 각자의 매력을 갖고 있다. 그러니 사실 누구를 골라도 큰 후회는 없을 듯. 근데 공교롭게도 원작을 읽어 보고 나니, 이 모두가 소설 속 댄버스와는 많이 다르다는 생각을 했다. 특히 이 중 가장 어린 축에 속하는 장은아의 경우는 정말 거리가 멀었다. 일단, 뮤지컬의 댄버스가 원작에 비해 어마무시하게 매력도가 높아졌기 때문에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흥미롭게도 뮤지컬 시상식에서 댄버스 역의 배우는 '여우주연상'이 아닌 '여우조연상'의 후보에 오른다. 사실 이 작품을 보고 나오면 가장 뇌리에 박혀 떠오르는 건 이 '댄버스' 부인인데도 말이지. 아마도 그건 원작에 대한 존중인가? 싶기도.

'나(Ich)'는 작품 내내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이 작품의 '화자' 역할인데, 극 중반 부터는 그 느낌이 들어오지 않는다. 어느 순간 3인칭으로 풀린다는 이야기다. 그게 의도적인 장치인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추리물이 소설이나 영화로 구현되느냐 아니면 뮤지컬로 구현되느냐의 차이가 아닐까 싶다. 김보경을 초연 때 보고, 그 사이 '나'는 잘 기억이 안난다. 마지막으로는 박지연으로 봤다. 사실 그냥 기억 안 나는 '나'가 원작과는 가장 맞았구나 싶다. 그렇게 보면 매력적인 '나'라 느꼈던 박지연은 너무 다른 캐릭터가 되었다. 원작에서의 '나'는 왜 막심이 이 집으로 데려왔는지 전혀 이해가 안 갈 정도로 고구마 백만 개의 열등감과 자격지심으로 쩔어있는 인물이었다. 뭐지 - 싶은. 정말 벨벳 원피스를 입을 것 같지 않은 초 수동적이고 자신감 제로의 여자라 데려온 것인가. 이런 상처투성이의 비뚤어진 막심 같으니라고 ...

어쨌거나 소설과 뮤지컬의 캐릭터 이야기는 대략 이정도.

결국은 사랑

이러니 저러니 해도, 결국 이 작품은 '사랑'에 대한 이야기다. 사랑을 받는 것과 사랑을 주는 것에 대한 이야기. 모든 사람은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고, 또 사랑할 의무가 있다고 하지만 ... 과연 그런가, 에 대한 질문을 나는 이 작품을 통해 해볼 수 있었다. '사랑의 힘은 위대하다'는 식의 식상한 명제는, 이 세상에 나온 지 반세기가 넘은 이 작품이 지금 우리에게 남아있는 것처럼 여전히 유효한 가치일 것이다. 물론 이 안의 사랑들이 과연 진정한 사랑이냐 아니냐를 따지는 건 또 다른 문제일 것이다. 하지만 그냥 요즘은 그것 역시 다른 이름의 사랑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한다. 다만 사랑의 힘이 위대하다는 건, 언제나 '선'의 방향만은 아니라는 것 정도가 지금의 내 결론.

사랑은 때로 자신을 파괴하고 남을 파괴하고 ... 또 반대로 나와 남을 살릴 수도 있는 법이다. 레베카를 둘러싼 많은 사람들은 그녀에 대한 사랑으로 인해 그렇게 살아남고 또 죽어간 것이겠지. 그런데 무엇보다, 누군가에게 사랑을 주기 위한 가장 큰 전제조건은 누구보다 나 자신을 스스로 올바로 사랑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봤다. 내가 느낀 이 작품의 가장 큰 메시지였다.

레베카는 작품에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우리의 마음 속에 존재하는 것일 테다. 가장 아름다운 것은 가장 추악한 것이 될 수 있고, 또 그리 아름답지 않았던 것이 어쩌면 가장 고귀한 것이 될 수도 있다. 레베카와 '나'가 대척점에 있으면서도 '동일 이름'으로 겹쳐지는 건, 그래서가 아닐까.


또 다른 이야기, 집착

사실 이 작품이 '사랑'에 대한 이야기라고 결론짓기 위해서는 사랑의 전제가 집착에 기인한다는 걸 인정해야만 한다. (어쨌거나 난 인정) 과연 사랑이 집착 없이 가능한가. 애착 역시 집착의 한 갈래 아닌가. 그렇다면 집착과 애착의 경계면은 어디인가. 이번에 <레베카>를 읽고 보며 든 생각이다. 여전히 뱅뱅 도는 질문.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레베카를 진정으로 사랑했던 사람은 결국 댄버스 부인이렸으려나 ... 아마도 이 원작이 영화로도, 뮤지컬로도 재현된 건, 아마도 이 댄버스의 집착의 매력을 재해석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아마도 막심과 '나'는 앞으로 잘 살아갈 것이다. 서로 사랑하니까. 위기를 함께 넘겼으니까. 그러나 둘다 영리하지는 못하다. 그냥 자신들의 범죄를 누르고, 또는 용인한 채로 구순구순 현실에 만족하면서 살 것이다. 어찌 보면 이런 무모하고 외진 곳에 쫓아온 '나'의 사랑은 엄청 세속적으로 보이고, 반 호퍼 부인의 수행원으로 따라온 순진하다 못해 약간 백치미가 있는 '나'를 덜컥 맨덜리 저택의 안주인으로 데려온 막심도 딱히 현명하고 신중하지는 않아 보인다. 너무 맹목적이잖아.

그래서 사실 이 작품을 다 보고 나면, 그 주인공 부부가 (결국은 악역이라고 할 수 있는) 댄버스 부인보다 나을게 없어 보인다. 그러니 적어도 이 뮤지컬의 주연은 댄버스 부인으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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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준히 공연장을 찾은 것이 어언 15년이 되었습니다. 이곳에선 그간 꾸준히 객석에서 느꼈던 다양한 이야기를 함께 해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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