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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리 엘리어트] 뮤지컬 vs. 영화 vs. 소설

[빌리 엘리어트] 뮤지컬 vs. 영화 vs. 소설

부정하기 힘든 '이 시대 최고의 뮤지컬'

풀잎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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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리 엘리어트의 시그니처 포스터

<빌리 엘리어트>가 재밌을 수밖에 없는 이유

예전에 작가 김영하 작가의 팟 캐스트에서 재미난 말을 들었다. 이야기가 재미 있으려면, ‘생소한 곳에서 벌어지는 있음직한 이야기’여야 한다는 것이다. 생소한 곳의 생소한 이야기는 이해할 수 없고, 익숙한 곳의 익숙한 이야긴 흥미가 떨어지니 말이다. <빌리 엘리어트>의 시공간적 배경인 대처 수상 집권기의 영국 탄광촌은, 나에겐 참으로 생소한 공간이다. 그러나 그들이 벌이는 파업과 노동계의 고난, 그 사이에 벌어지는 부모와 자식 간의 이야기, 어린 아이의 꿈에 대한 열망, 재능 있는 제자를 기르고자 하는 선생의 바람은 지금 한국에 돌려놓는다고 해도 그리 낯설지 않다. 즉. ‘익숙한’, 그리고 ‘있음직한’ 이야기라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지루하거나 시시하지 않다. 그건 재능을 가진 천재 아이의 이야기라는 희소성과 영국 탄광촌이라는 신선한 공간에서 오는 낯설음 때문이다. 빌리의 친구 마이클이 갖는 성정체성에 대한 고민(이기보다는, 어린아이가 할 수 있는 ‘당연’하고 ‘귀여운’ 반응)이 더해지고, 일찍 돌아가신 엄마와의 조우, 어린 발레리노의 이야기까지 겹쳐지고 나면 이 이야기는 매우 새롭고 신선한 내용으로 켜켜이 쌓이게 된다.


세 마리의 토끼

영화 <빌리 엘리어트>는 잔잔하면서도 순간순간 격정적으로, 또 그러면서도 절대 우울하지 않게 진행된다. 뭔가 기묘하면서도 천재적인 느낌의 빌리가 간간히 추는 춤과 너무나 사실적으로 그려지는 탄광촌 인부들의 파업 시위. 그 극렬한 대비는 극적 긴장감을 더 해준다. 이 작품의 원작인 영화는 흥행과 작품성, 양쪽의 토끼를 다 잡은 보기 드문 수작이다. 탄광촌 출신 작가로 알려져 있는 리홀은, 자신의 경험과 상상력을 이 작품에 훌륭하게 녹아냈다. 이번에 읽은 책은 좀 독특하게 영화를 다시 소설로 만드는 작업을 진행했는데, 평소 리홀이 존경하던 작가 멜빈 버지스에게 부탁해서 이루어진 작업이었다고 한다. 내용은 영화나 뮤지컬의 그것과 거의 동일했지만, 아무래도 책이 가진 특성 상 영상과 뮤지컬이 표현하기 힘든 사이사이 심리묘사가 더 상세하게 드러나서 정말 좋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영리했다고 생각하는 건, 그 장점을 극대화하기 위해 장마다 등장인물을 돌아가면서 1인칭 화자로 등장시킨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물 각각에 대해 새롭게 알게 된 것이 많았다.


그리고 뮤지컬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에는 훌륭한 안무와 자잘한 볼거리, 그리고 엘튼 존의 우월한 음악까지 더해졌다. 성인들의 연기는 빛을 발하고, 작품 속 빌리에 버금가는 현실의 뛰어난 소년들은 지금 우리 눈앞에 있다. 이 작품이 재미없을 이유는 그 어디에도 없다. 유감스럽게도. 원작인 영화 <빌리 엘리어트>를 이미 꽤 오래 전에 보았다. 그간 원작을 보고 다시 그 변용작을 봤을 때 그 만큼 감흥을 받기란 길 가다가 번개 맞기만큼 힘들다는 걸 체험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이젠 그 번개 맞은 경험 가운데 하나로 이 작품을 꼽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심지어 책까지 좋다니. 이건 원작의 힘일런가!) 아마도 영화에서는 체험할 수 없는 라이브 무용이 있기 때문일 수도 있고, 또 그때는 만날 수 없었던 음악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어쨌거나 이 작품은 꽤 영리한 연출과 구성, 그리고 안무를 소유하고 있다. 특히 넘버 ‘Solidarity'에서 보여주는 발레 교실과 시위 현장의 교차는 어떤 무대에서도 볼 수 없었던 미묘한 불균형과 조화를 한 장면에 보여주는 독특한 연출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빌리 엘리어트>가 가진 최대의 강점이라면, 여느 대형 무대에서 ‘주’로 볼 수 없었던 아이들의 연기와 노래를 ‘주’로 볼 수 있다는 것일 테다. 그것도 매우 훌륭하게 훈련된 모습으로 말이다. 어른들과 동등 선상에서 그들은 연기하고 노래하고 그리고 춤춘다. 남녀노소가 한 번에 맞춰내는 하모니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이 작품을 보면 비로소 깨닫게 된다.


아이들이 공격하는 마음의 약한 지점

엄밀하게 말해서 우리 뮤지컬 속 빌리들의 연기가 매우 자연스럽다고 보기는 힘들다. 아직은 어린 아이들이기 때문일까. 공연을 보면, 아이 연기 특유의 밝고 경쾌한 ‘안녕하세요!’나 뭔가 급작스러운 ‘흑’하는 눈물. 강약이 보이지 않는 매끄럽고 청아한 노래. 힘이 가득 들어간 ‘열심’ 댄스. 너무나 열렬히 뛰어다니는 무대 움직임 등. 이렇게 소년들은 ‘나 연기하고 있어요’를 온몸으로 발산한다.

하지만 빌리 스쿨에서 오랜 기간 훈련하여 배출하는 이 한국의 빌리들은 각각 완벽에 가까운 퍼포먼스를 보여준다. 날 때부터 기본 재능을 타고난 아이들의 습득 능력은 분명 놀라운 수준이었을 것이고 이 무대는 그 잠재력이 꿈틀대는 시작점일 것이다. 분명 이 아이는 지금 날개짓을 시작하는 것이겠지. 내가 지금 그 시작을 봤다는 것을 기쁨으로 삼게 될 날은 반드시 온다. 그 산 증거가 바로 나. 실제 우리나라에 <빌리 엘리어트>가 처음 시작된 10년 전, 지금 첫 빌리들의 어린 시절을 봤던 그 시간을 훈장 삼아 지금도 이야기하고 있으니 말이다.

"내가 저 친구 빌리 초연을 할 때 봤는데 말이지 ..."


<빌리 엘리어트>가 가진 파괴력

눈 앞의 어린 아이들은 정말 순수하게 그 무대를 재능과 열의로 채운다. 아무리 능숙하고 재주 많은 어른도 할 수 없는, 그 나이의 그 크기의 아이만이 만들 수 있는 ‘감동’이다. 그 점에 있어서 <빌리 엘리어트>는 정말 엄청난 파괴력을 가진 무시무시한 작품이랄 수밖에 없다. 기본적으로 이 작품은 엄청난 재능을 가진 어린 배우를 무대 정면에 거의 풀타임 동안 세운다는 자체만으로 위력적인 ‘감동’을 깔고 들어간다. 그건 아이의 시선을 정면에 두고 진행되는 영화도 마찬가지. 그 아이가 가진 파워풀한 동작과 말투, 그리고 눈빛. 빌리의 아버지는 크리스마스 날 빌리의 춤을 보고, 그 아이의 열정을 알게 된다. 그리고, 바로 윌킨슨 선생에게 달려간다. 그 완고하고 강한 아버지가 말이다. 그 설득력은 아마 화면을, 무대를 보고 있는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로 작동한다. 그건 바로 어린 아이들이 갖는, 그 아이들의 꿈이 갖는 맹목적인 힘이다. 그보다 강한 것이 과연 이 세상에 또 무엇이 있을까?


이 무대에 ‘빌리’라는 이름으로 서고 있는 모든 아이들은 아직 ‘매너리즘’을 배우기에 너무나 어린 나이. 당연히 그때 그때를 맹목적인 열정과 재능으로 이 무대를 풍만하게 채우고 있을 테다. 아파서 힘이 다해 쓰러질지언정, 노련하게 빠져나가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그게 바로 철없는 어린 아이들이 갖는 특권일 것이다. 경력 있는 배우들이 노련하고 자연스럽게 무대의 위기를 모면하는 것 역시 관객으로는 꽤 즐거운 볼거리임에는 분명하다. 하지만, 긴장이 가득한 무대에서 아이들의 터질 듯한 열의를 보는 것은 어른의 그것보다 더한 감동을 주는 것이 사실이다. 이 아이들은 엄청나게 훈련받았다는 걸 이미 몸으로 보여주고 있었고, 무대는 그 긴장감으로 팽팽하게 당겨져 있었다. 이미 객석에 앉은 어른들은 모두 무장 해제가 되어있었다. 게다가 그 아이들은 그 긴장 가운데, 실수 없이 무대를 채워내고 있었다. 노련한 무대가 가질 수 없는 풋풋한 아름다움. 그것이 이 <빌리 엘리어트>에게 있다. 그리고 그건 여느 무대가 보여줄 수 없는 독특하고 개성적인 미덕이다.


빌리들의 아름다운 미래를 위해

쉽지 않은 작품을 한국에서 꾸준히 올리고 있는 제작진들에게 일단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아이들을 동원해야 하는 공연이기에, 오리지널 내한 공연이 불가능에 가깝다는 걸 예전에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내가 외국으로 날아가지 않는 한, 눈으로 확인하기 힘든 무대였다는 이야기. 하지만 설령 그곳에 간다 한들, 엄청나게 유창한 영어를 구사하지 못하는 내가, ‘한국어’로 하는 공연과 동일한 감동을 받고 올지는 미지수였을 것이다. 이렇게 한국어로 한국 아이가 하는 연기를 보는 것만으로도 <빌리 엘리어트>는 그 자리에 참여할 가치가 있었다. (이 부분은 예전에 북뮤지컬에서 함께 읽었던 <마틸다>도 마찬가지다.)


꿈을 가진 자는 아름답다고 한다. 빌리 엘리어트의 이야기가 아름다운 건, 가난한 탄광촌에서 어렵게 꾼 꿈이 주변 이들의 아름다운, 그리고 눈물겨운 노력으로 꾸역꾸역 앞으로 전진할 수 있었기 때문일 테다. 그것이 꺾이지 않고 갈 수 있었던 건, 빌리의 뜨거운 열망이 가장 컸겠지만, 그것을 소중히 여길 줄 알았던 주변 가족과 어른들의 배려가 함께 해서였기 때문이고. 이 작품의 빛은 그 때문에 우리 모두를 감싸안는다. 어른에게도 아이에게도 꿈을 이루기 위한 제 각기의 역할이 존재한다는 걸 알려주니말이다.


나가며: 어른과 아이가 같이 꾸는 꿈

원래 공연이나 영화를 보고 잘 울지 않는데, <빌리 엘리어트>를 보면서 처음으로 울컥했던 장면이 있었다. 바로, 빌리의 합격이 결정된 이후 아버지와 이웃 광부 아저씨들이 이 아이를 둘러싸고, 무등을 태워 노래를 부르던 그 장면이었다. 그러고 나서, 그들은 광구에 들어가고 남겨진 빌리는 이 탄광촌을 벗어나 새로운 길을 가게 된다. 영화에서도 그 장면이 대비되어 편집되었다. 그렇게 빌리는 무거운 짐 가방을 들고 홀로 버스에 오른다. 어쨌거나 이들은 이 작은 아이에게 쓰러져 가는 이 마을의 운명, 그리고 꿈을 의탁한다. 사실 그들은 이제 자기 힘으로는 더 이상 대적할 수 없는 시대의 힘에, 이미 굴복한 상태였다. 석탄 산업은 하향기에 있었고, 정부의 압박은 심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시도한 영국 최장기 파업이 처절한 실패로 끝난 상황이었다.

형 토니의 말대로, 아마도 빌리가 돌아오는 그땐, 이 마을도 이웃 마을도 모두 실업자가 되고 탄광은 문을 닫을지도 모른다. 이 부분이 유난히 다가왔던 건, 언젠가 우리나라 태백에서 본 구 시가지의 모습과 이 대사가 겹쳐졌기 때문일 것이다. 이 아이는 이제 얼마나 무거운 짐을 어깨에 메고 살아야만 할까. 그렇게 그 아이는 오래 전 세상을 떠난 엄마와도 이별을 고한다. 과거도 엄마도, 아버지와 형도, 그리고 윌킨슨 선생님도. 탄광촌에 묻고 떠나는 것이다.


영화에서는 결국 빌리가 백조로 비상하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이들의 희생과 이 아이의 도전이 결실을 거뒀다는 걸 보여준다. 이 부분을 소설에서는 더 상세하게 아버지 재키의 입장에서 묘사한다. (그리고 뭔가 좀 신기한 부분도 들어있다. (...) 아마 그 자리에 있었다면 정말 대형 관크라 기억될지도 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러나 뮤지컬에서는 빌리가 떠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로열 발레 스쿨의 위용과 오디션 때 했던 면담 내용으로 볼 때, 이 아이는 앞으로 힘든 삶을 살겠지 ... 라는 건 충분히 예측할 수 있지만, 그 결말은 모른다는 것. 현실의 나로 돌아와 이 공연을 생각하면, 이런 퍼포먼스를 보여주기 위해서 무대에 서는 아이들이 얼마나 지극한 노력과 훈련을 했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결국 모든 아이들은, 그렇게 자기 세계를 극복하고 앞으로 나아가야만 하는 법. 그걸 이끌어주고 밀어주는 건 ... 아마도 어른의 몫일 것이다. 나는 좋은 어른인가. 그런 자질을 가지고 있는가. 그렇게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는가 ... 매번 빌리를 보면서 회의하는 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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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준히 공연장을 찾은 것이 어언 15년이 되었습니다. 이곳에선 그간 꾸준히 객석에서 느꼈던 다양한 이야기를 함께 해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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